개인

선택적인 기준

동철 김 2017. 5. 1. 11:29

자신을 주변을 그리고 모든 상황을 당위적인 기준이 아닌 가능성이 열려 있는 선택적인 기준에 따라 순리적이고 담담하게 수용하고 판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자신을 자신의 당위적인 기준에 가둬두고 그속에서만 살아가도록 하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를 지치게 만드는 것임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기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상황적인 선택적 기준과 자신의 당위적 기준이 충돌하는 상황을 굳이 만들어 그속에서 힘들어 할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힘들어 하는 것이 불필요한 소모전이라는 것이다. 내 삶도, 내 인생도, 내가 처해 있는 그 어떤 상황도 내가 정해 놓은 당위적인 기준에 맞춰 사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상황과 적절히 조화를 이루면서 사는 것이므로, 때로는 그럴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가질 필요도 있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그렇게 맘 편안하게 수용하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황까지도 다른 나만의 기준을 앞세워 판단하였기에 스스로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힘들게 하였던 경험이 있다. 그냥 때로는 바람이 부는 상황에 맞춰 흔들려 줄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는 것에 쓸데 없는 걱정 없이 맘 편하게 생각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내 기준에 맞느냐 맞지 않는냐는 중요하지 않다.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세상은 조직은 상황은 그렇게 흘러가게 되어 있다. 난 작은 조직원이고 그 조직이 바라는 방향과 방법대로 일을 해야 하는 본질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때로는 망각하였던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래서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기준과 원칙대로 상황을 전개하고 그것이 수용되지 않으면 스스로 힘들어 했다. 그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이제와서 보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소모전을 한 것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생각을 해야한다. 그런데 그 생각의 기준이 나여서는 안된다. 조직, 상대방의 기준이어야 한다. 그것이 나와 맞느냐 맞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이제 그런 자세와 마음 가짐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조화를 이룰 수 있다. 그렇지 않고 또 예전처럼 행동해서는 또다시 스스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 원칙과 기준을 정하지 말자. 그것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지는 것이다. 대화, 타협, 협의, 조율, 조화가 이미 정해진 원칙과 기준의 충돌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순한 소모전에 불과할 것이다. 해결책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일방의 해결책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이기적인 것이다. 이제까지 난 그것이 나 자신의 우수함을 타인에게 보여주는 방식이라고 오해하였던 것 같다. 내 기준에 타인을 따르도록 하는 것 그것이 나를 돋보이게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타인을 세워 주면서 스스로가 아래에 있더라도 그 모습이 당당하고 올바를 수 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것이 더 의미가 있고, 중요한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내게 주어진 일을 내가 판단하고 제단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것임에도 난 이제껏 그래왔다. 변화를 말하면서도 변화하지 못했던 지난날의 나를 다시금 뒤집어 본다. 왜 그렇게도 스스로가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것을 쉽게 인정하려 들지 않았을까? 왜 그렇게도 스스로가 다른 사람보다 조금은 낫다라는 건방진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을까? 왜 타인으로부터 존재의 부정을 받았을 때 상처를 깊게 받고 그것을 잊지 못했을까? 왜 내 기준에서 타인의 가치를 단순 논리적으로 판단했을까? 왜 내 능력이 아닌 부분까지 내 능력일 수 있다고 오해를 하였을까? 그래서는 안됨에도 불구하고.